임승관 질병관리청장이 다음 팬데믹(대유행)에 대비한 감염병 대응 체계의 대대적인 고도화 구상을 발표했다. 과거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장기화된 거리두기, 일률적 방역 조치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과 국민 피로도를 고려해, 미래 감염병 위기에는 보다 유연하고 과학적인 관리 체계를 설계하겠다는 의지다. 임 청장은 지난 19일 충북 청주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팬데믹에는 주기성이 있다”며 과거의 성공 경험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인구 구조 변화, 정부 재정 여건, 사회적 통합 수준, 국제 정세, 과학기술 발전 등 복합적인 요소를 포괄적으로 조망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다음 팬데믹, ‘대비-대응-회복’의 새로운 패러다임
임 청장은 코로나19와 같은 호흡기 감염병을 전파력은 높지만 치명률은 상대적으로 낮아 퇴치보다는 공존을 전제로 관리해야 하는 ‘팬데믹형 감염병’으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감염병 관리 단계를 ‘대비-대응-회복’으로 고도화하는 구상을 제시했다. 팬데믹형 감염병은 초기 위험 통제에만 매달리기보다 이후 단계까지 염두에 둔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감염병 발생 100일 이내 실체 규명, 200일 이내 백신 개발·접종을 팬데믹 대응의 핵심 기준으로 제시하며, 이 단계를 달성하면 회복 국면에서 사회·경제 정상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 코로나19 당시 시행된 확진자 동선 공개, 방역패스, 거리두기 등 일률적 조치에 대한 한계도 인정했다. 임 청장은 “초기에는 불가피한 조치였지만, 뒤로 갈수록 충분한 설명과 조망이 부족했다”고 지적하며, 과학적 실효성이 있었던 부분과 과도했던 부분을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아울러 신뢰와 국민 수용성이 떨어질 경우,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대응을 모색해야 한다는 인식도 함께 밝혔다.
이러한 대응 전환의 전제로는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체계’ 구축이 강조됐다. 감염병 발생 초기부터 연구·분석·현장 정보가 따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질병관리청은 이를 위해 감염병 감시, 임상 정보, 역학조사 결과 등을 통합하는 ‘질병관리 빅데이터 플랫폼’ 구축을 추진하고 있으며, 오는 2027년 하반기 완성을 목표로 한다. 임 청장은 이 플랫폼이 감염병 대응 전 과정에서 보다 정교한 판단과 시의적절한 정책 결정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감염병 기금’ 복원 추진…신속한 재정 투입 구조 마련
임 청장은 감염병 대응 체계 고도화를 위해 재정 구조 역시 손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감염병 위기 대응에는 신속성이 핵심인데 반해, 예비비나 추가경정예산(추경) 중심의 국가 재정 투입 방식은 속도에 한계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감염병 국민 보건위기 대응 기금’ 조성을 질병관리청의 바람으로 제시했다. 평상시에는 기금의 절반가량을 감염병 인프라 구축에 쓰고, 나머지는 적립했다가 위기 발생 시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상시 재원 구조가 필요하다는 구상이다.
재원 마련 방안으로는 윤석열 정부 당시 폐지된 ‘국제질병퇴치기금’의 복원을 언급했다. 항공권에 포함된 출국납부금 중 1000원을 적립해 조성됐던 이 기금은 과거 개발도상국 감염병 퇴치 공적개발원조(ODA)에 활용되어 왔다. 임 청장은 “ODA에 100% 쓰기보다 일부는 국내 감염병 대응 인프라와 미래 대비에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금이 복원될 경우 연간 약 500억원 규모의 재원 확보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현재 외교부와 협의 중이며, 대통령실 보건복지비서관 및 사회수석실에서도 이 취지에 공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질병관리청의 이번 구상은 과거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미래 감염병 위기에 보다 능동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처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데이터 기반의 과학적 접근, 유연한 대응 단계, 그리고 안정적인 재정 확보를 통해 다음 팬데믹에 한층 더 강화된 방패를 마련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에네 기자 (ene@dailynode.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