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회 헌혈 대기록 진성협 씨, 40년 ‘생명 나눔’에 바친 삶

제주에서 국내 최다 800회 헌혈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진성협 씨의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명예의 전당에서 1위를 차지한 그는 40년에 걸쳐 ‘생명 나눔’을 꾸준히 실천하며, 자신의 삶을 통해 헌혈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헌혈을 “1초의 찡그림과 30분의 시간 투자로 환자의 50년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이 경이로운 기록 뒤에는 어떤 사연과 신념이 숨어 있을까.

한 친구의 아픔에서 시작된 40년 여정

진성협 씨의 헌혈 여정은 1981년 고등학교 재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재생불량성 악성빈혈로 고통받던 초등학교 동창의 소식은 그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의료 기술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아 헌혈 인구가 적었던 시절, 친구들을 돕기 위해 헌혈증서 모으기 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서울역 앞 헌혈 버스를 보고 처음으로 바늘을 잡았다. 아픈 친구에게 자신의 혈액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 그의 첫 헌혈로 이어졌고, 이는 40년 생명 나눔의 위대한 시작점이 되었다.

그는 헌혈을 지속하기 위해 직장에서의 승진 기회마저 포기했다. 잦은 인사이동이 불가피한 승진을 택할 경우, 꾸준한 헌혈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제주에서 봉사활동과 헌혈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선택한 그는, 1996년 제주에 성분채혈기가 도입된 이후로는 2주마다 헌혈을 실천하며 횟수를 늘려갔다. 심지어 탈모 치료를 위해 약을 복용하면 헌혈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머리 대신 헌혈을 택할 정도로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건강 관리와 봉사, 나눔을 위한 삶의 방식

헌혈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강 관리가 필수적이다. 진성협 씨는 30대 후반부터 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점심시간마다 직장 뒤 월라봉에 올라 견과류를 먹으며 55분 코스를 완주했고, 2023년 정년퇴직 후에는 매일 1만 5천 보 이상을 걸으며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꾸준한 자기 관리는 800회라는 대기록의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그의 나눔은 헌혈에만 그치지 않았다. 1993년 12월, 그는 다헌혈자와 의료 관계자들을 모아 ‘나눔적십자봉사회’를 결성해 32년간 활동해오고 있다. 이 봉사회 회원들의 총 헌혈 횟수만 해도 3,500회가 넘는다. 봉사회는 매월 1회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여 말벗이 되어주고 밑반찬을 전달하며 목욕 보조, 학습 상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웃을 돕고 있다. 진 씨의 아들 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80회 이상의 헌혈을 실천하며 나눔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1천 회를 향한 꿈, 헌혈 활성화를 위한 제언

진성협 씨는 헌혈 정년인 69세까지 현재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약 990회 헌혈이 가능하다고 계산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1천 회 헌혈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서는 혈액관리법 개정을 통한 헌혈 정년 연장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고령화 시대에 수명은 늘고 환자 수요는 많아지는 만큼, 헌혈 정년 연장이 절실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에게 있어 헌혈은 단순히 기록을 쌓는 행위가 아니라, 병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는 숭고한 약속이다.

그는 지금까지 모아온 757개의 헌혈증서를 백혈병, 선천성 심장 판막증 등 여러 환자에게 전달하며 새 생명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1997년 백혈병으로 투병하던 환자 가족에게 헌혈증서를 우편으로 보내줬고, 이후 완치된 사촌 누나의 감사 편지를 받았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진 씨는 매년 겨울철마다 반복되는 제주 지역의 혈액 부족 현상에 깊은 아쉬움을 표했다. 섬 지역 특성상 기상 악화 시 혈액 수급이 더욱 불안정해지는 점을 지적하며, 학생들의 방학 기간에도 도민들의 꾸준한 헌혈 참여를 당부했다. 더 나아가 헌혈 활성화를 위해 공공기관뿐만 아니라 민간 기업에도 헌혈 공가 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청년층의 참여를 독려하고 사회 전체의 헌혈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다.

진성협 씨는 마지막으로 “과학과 의료 기술이 발전해도 아직까지 혈액은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며, “우리가 흘리는 헌혈은 우리 몸속의 여분 혈액으로,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는 환자의 50년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랑의 실천”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숭고한 헌신은 우리 사회에 생명 나눔의 소중한 가치를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에네 기자 (ene@dailynode.co.kr)